세상을 떠난 사람을 바로 비판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저 역시 그 말에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더구나 한국천주교의 상징적인 인물이기에 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어 밤을 지새우며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성역은 없다’는 평소의 신념대로 글을 쓰며, 제가 지금 처한 특수한 환경 때문에 자료가 빈약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김수환이란 이름은 개인이 아닌 종교지도자이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공인이요 한국천주교 최초의 추기경이란 중책을 맡은 사람이니 일반인들과 같은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더 냉엄한 평가와 비판을 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제 종형 한 분이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계시면 쉰여덟이니 그 시절에 일류대학에 대학원까지 나왔으니 잘 나갔지요.
선산에 묻히기 전 집 근처에서 노제를 지냈는데 “남들에게 그렇게 모질게 하더니 자식이 먼저 죽는 험한 꼴 본다.”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가까이 사시는 작은 고모는 피눈물을 쏟았다고 합니다. 업어서 키운 조카의 죽음 앞에 마냥 눈물만 나올 뿐인데 ‘안 됐다’는 말은 없고 ‘자식 먼저 죽는 험한 꼴 본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질 수 밖에 없지요. 개인에게도 그런데 한국천주교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면 마냥 애도만 할 게 아니라 공과에 대한 냉엄한 평가와 비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입니다. 칠순의 어느 추모객은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였고 그 분의 말씀은 우리 민족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며 애도 하셨는데 과연 그랬는지 차분히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한 청년 김수환, 그 옆의 사람은 전석재 신부. 이 사진에 대해 납득할만한 명확한 해명부터 해야 한다.
김수환이란 청년은 일제 치하 일본군 장교로 복무를 했습니다. ‘강제로 끌려갔다’고 하지만 장교 신분이 과연 강제였을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적극적인 충성이거나 적당히 줄 서서 몸 보존 하려는 보험성의 선택이던지 둘 중의 하나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청년 김수환은 치열한 저항 대신 부일 행위를 했다는 비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 앞서 한국천주교의 역사 역시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이 제국주의 앞잡이로서 군함을 타고 선교사라는 자들이 들어왔습니다. 선교를 한다는 자들이 왜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인 군함을 타고 들어와야 하는지 한국천주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히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청년 김수환의 부일행위와 천주교의 부일 행위에 대한 비판
이또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열사를 복권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해명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민족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의인을 이제 와서 명예회복을 했으니 지난 날 더럽히고 짓밟은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일제 치하 한국천주교회는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않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습니다. 신사참배란 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무자비한 탄압이 아니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우린 잘 압니다. 당시 주교였던 노기남은 앞장서서 일제에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까지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 남기지 않았습니다. 한국천주교의 역사의식의 한계와 수준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임에 분명합니다.
천주교가 아무리 교구중심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교구장의 임명권이 교황에게 있기 때문에 비신자들은 마치 ‘검사동일체’ 처럼 같이 본다는 것을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분명 김수환 추기경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를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지금까지 한 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고 오히려 변명으로 일관하며 얼버무렸습니다. 종교 지도자라면 누구보다 먼저 진솔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건만 김수환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다까끼 마사오(박정희)의 독재가 판을 칠 때 권력을 향해 비판하는 것은 목숨을 내 놓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함석헌 선생이나 장준하 선생 같은 분들을 우린 존경합니다.